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이 다가왔다. 3월의 첫 날, 제임스 포터는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휘날리며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다. 공강 시간에 그리핀도르 휴게실에서 빈둥거리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같이 머글 연구 수업을 듣는 시리우스가 잠든 그를 깨우지 않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수업이 시작한지 30분이나 지난 후였다. 보통 때라면 꾀병을 부려서 땡땡이를 쳤겠지만, 최근에 꽤 스케일 큰 장난을 쳐 맥고나걸 교수와 여자친구 릴리 에반스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였다.
제임스는 시리우스를 보는 즉시 엉덩이를 걷어차주겠다고 다짐하며 머글 연구 교실의 문을 홱 열었다. 수업을 한창 진행 중이던 교수가 돌아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포터. 여태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니?"
"죄송합니다, 교수님. 쉬는 시간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떤 이름부터 속까지 시커먼 자식이 절 내버려두고 혼자 가버렸지 뭐예요."
'이름부터 속까지 시커먼 자식'이라는 말에 교수의 눈빛이 시리우스를 향해 번뜩였다. 낄낄 웃고 있던 시리우스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먹힐 리 없는 속임수였다. 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앉아라, 자리에 앉아...자. 어디까지 했더라?"
이게 왠 횡재? 감점을 예상하고 있던 제임스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점수가 깎인 걸로 릴리와 리무스에게 들을 잔소리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는데 잘됐다. 그는 교수의 너그러운 처사에 감동하며 자리로 향했다. 얄밉게 빙글빙글 웃고 있는 시리우스를 한 대 걷어차는 시늉을 한 제임스는 자리에 앉아 얌전히 책을 펼치고 깃펜을 들었다. 관대한 처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랜만에 모범적인 수업 태도를 보여드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그 생각을 정확히 24분 19초 후에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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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과제라니, 추가 과제라니....차라리 감점을 하실 것이지. 과제에 시험공부에 전교회장 업무에 퀴디치 연습에....릴리랑 데이트할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점심 시간. 테이블에 오른쪽 뺨을 대고 엎드린 제임스가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연회장까지 비틀거리며 도착한 그는 좋아하는 당밀 퍼지와 키드니 파이를 보고도 여전히 좌절 모드였다. 그답지 않은 모습에 점심을 먹으러 오는 학생들마다 시리우스에게 '포터 왜 저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시리우스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기만 할 뿐, 이렇다할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다른 선택 과목을 듣고 막 도착한 리무스 역시 시리우스에게 눈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가, 제임스의 실의에 빠진 중얼거림을 듣고는 자리에 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차라리 감점을 하라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누구누구 때문에 바닥을 긁고 있는 그리핀도르 모래시계를 한번 보고 나서 하시고. 무슨 일인데?"
"자다가 수업 시간에 늦었어. 징계로 추가 과제."
시리우스가 키드니 파이를 자르며 간략히 설명했다. 제임스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져있든 말든, 적당히 자른 파이를 음미하는 시리우스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리무스가 제 몫의 음식을 덜며 물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패드풋? 너도 같이 징계받은 거 아니야?"
"오, 무니. 착한 학생은 수업 시간에 늦지 않는 법이지. 난 정시에 맞춰 머글 연구 교실로 갔다네."
"뭐야. 둘이 같은 수업이잖아. 안 깨워줬어?"
"7학년씩이나 돼서, 그것도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학생회장께서 시간관리 하나 못해서 쓰나. 난 우리 회장님이 자기 스케줄 관리를 철저히 하는 성년으로 자라길-켁!"
포크를 까딱이며 어른스러운 척 훈계를 늘어놓던 시리우스가 순간 헛구역질을 했다. 무언 주문으로 시리우스의 혀를 묶어버린 제임스가 끄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뻥치지 마, 패드풋. 슬리데린 기숙사 앞에 트랩 설치할 때 너 자는 동안 워미랑 둘이 다녀왔다고 삐친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치사하고 쪼잔한 멍멍이 자식."
역시나 무언 주문으로 혀 묶기 저주를 해제한 시리우스가 씩 웃었다.
"이런, 들켰군. 초식 동물이라 그런지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추가 과제는 뭔데?"
몰려드는 불안감에 리무스가 화제가 전환되길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혀 묶기 저주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싸움 -을 빙자한 장난- 이 계속된다면, 그리핀도르 모래시계뿐만 아니라 그의 위장마저 빈곤해질 것을 리무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바람대로 대화의 방향을 바꾼 제임스는 당밀 퍼지를 그릇째 제 앞으로 끌어당기며 툴툴거렸다.
"머글 연구 과제가 뻔하지. 머글들의 교통수단과 마법사들의 교통수단 비교, 머글들의 의식주, 머글들의 정치, 사회, 교육....오늘 과제는 머글들의 기념일과 마법사들의 기념일이야."
"원래 과제는 그런데, 추가 과제는 전제가 하나 더 붙지. 서양에는 없는 기념일."
"서양에는 없는 머글들의 기념일이라. 자료 찾으려면 꽤나 힘들겠는걸."
리무스가 도서관에도 얼마 없는 머글들에 관한 책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머글 연구 수업은 듣는 인원이 많지도 않고, 참고 서적도 몇 개 되지 않아서 다른 분야에 비해 책의 양이 적은 편이었다. 혼혈인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마법 세계에서 자라왔다 보니 머글들의 기념일에 대해 그리 많이 아는 편이 아닌데, 순수혈통인 제임스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서양에는 없는 머글들의 기념일은 리무스에게도 난해한 과제였다. 그 때, 시리우스가 툭 해결책을 내놓았다.
"에반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아무리 몰라도 우리들보다는 많이 알 걸."
"안 돼. 그러면 왜 추가 과제를 받았는지 설명해야 하잖아. 안 그래도 밉보였는데 더 미움받기는 싫다고."
제임스가 불쌍한 척 눈을 가리고 우는 시늉을 했다. 시리우스와 리무스는 동시에 또 시작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7년간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볼 꼴 못볼 꼴 다 본 사이였지만, 사랑에 빠져 유아기로 퇴행한 듯한 친우의 모습은 그들로서도 적응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릴리와 제임스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즈음에는 진짜 제임스 포터가 맞는지 패트로누스로 확인하거나, 제임스의 콧소리를 참다 못한 시리우스가 그를 두드려패는 일이 종종 있을 정도였다.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진 사랑에서 헤어나올 생각이 없는 제임스는 얻어맞으면서도 실실 웃어 도리어 때리는 사람이 무서워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릴리가 나서서 말린 후에야 제임스의 애교는 눈 뜨고 못 봐줄 꼴에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을 수는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날마다 늘어나는 자신의 인내심에 감사하며 리무스가 말했다.
"그냥 릴리한테 사실대로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해. 감점도 안 됐고 깜빡 잠들어서 수업시간에 지각한 거야,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실수니까 릴리도 별로 화 내지 않을거야."
"그래. 여태까지 우리가 친 사고에 비하면 지각은 아무것도 아니지."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목소리에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양 팔에 책을 가득 안은 릴리 에반스가 서 있었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 그녀의 가방과 책들을 받아들었다. 스케일 큰 장난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 다소 풀린 듯, 그런 제임스를 가볍게 흘겨본 릴리가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접시를 끌어당겼다.
"안녕, 리무스, 시리우스. 도서관에 있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얘긴 뭐야? 너희 또 무슨 사고칠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릴리. 아무것도 아냐. 매시포테이토 먹을래? 덜어줄까? 마실 건 뭘로 할래, 호박 주스? 차? 커피?"
제임스가 부산스럽게 음식을 덜며 릴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시리우스와 리무스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릴리는 수상하다는 듯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인 리무스의 얼굴에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자 일단은 알아내기를 포기하고 어느새 제임스가 다 담아 놓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앉아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던 시리우스가 순간 눈을 빛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시리우스는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귀족적이고 우아한 미소를 짓더니 전에 없던 정중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릴리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 중에 미안하지만, 에반스. 뭐 좀 물어봐도 되겠니?"
"음? 뭔데? 그 목소리 어색하니까 원래 하던 대로 해, 패드풋."
"오, 그럴 순 없지. 난 지금 레이디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중이니까. 만약 학년수석 릴리 에반스가 머글들의 기념일과 마법사들의 기념일에 대해 논술을 쓴다면, 어떻게 할 것 같니?"
능청스러운 그의 질문에 릴리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뭘 물어보려나 했더니, 머글 연구 과제구나? 글쎄, 나라면 머글 세계와 마법 세계에 공통적으로 있는 기념일-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에 대해 쓰고, 머글 세계에만 있는 기념일을 몇 개 조사한 다음, 그것들의 유래랑 기념일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 쓸 것 같은데. 대부분 이런 식으로 쓰지 않을까? 아니면 아까 말한 공통적으로 있는 기념일들 중 하나를 주제로 잡고 머글 세계와 마법 세계를 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훌륭한 조언 고마워. 그럼 혹시, 머글들의 기념일 중에 동양에만 있는 기념일에 대해서는 아는 거 없니? 내가 아는 어떤 멍청이가 ―윽!"
넌지시 제임스의 추가 과제에 대한 말을 흘리려던 시리우스가 별안간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 테이블 밑으로 시리우스의 다리를 정확히 걷어찬 제임스는 의아해하는 릴리에게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패드풋이 테이블에 다리를 부딪친 모양이네. 다리가 너무 긴 것도 불편하다니까. 안 그래, 패드풋?"
입은 웃는 상태로 자신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제임스를 본 시리우스가 얼얼한 정강이를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그러게. 어떤 테이블인지 확 부셔버리고 싶군. 아무튼 아는 거 있니?"
"동양 머글들의 기념일이라...동양에선 새해를 중시한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정확히 명칭까지 아는 건 하나밖에 없어."
"아는 게 있어? 그게 뭔데?"
자신과 관련없는 척 딴청을 피웠지만, 내심 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제임스가 냉큼 물었다. 시리우스는 말하지 말라더니 자기가 제일 티 내고 있다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다행히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릴리와 그런 릴리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는 듣지 못했다.
"화이트데이."
"화이트데이?"
"응. 발렌타인데이랑 비슷한 기념일인데, 일본의 한 머글 제과업체에서 발렌타인데이에 받은 초콜릿의 답례로 발렌타인데이의 한달 뒤인 3월 14일에 마시멜로우를 주는 행사를 했던 것에서 시작했다고 들었어. 발렌타인데이에 서로 초콜릿이나 선물을 주고받는 서양과 다르게 동양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날이랑,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이 따로 나눠져 있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어느 날에 누가 주는 건지는 기억이 잘 안 나. 큰 의미가 있는 기념일은 아니지만 나름 유명한 날이니까,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 어딘가에는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을까?"
설명을 마친 릴리가 살짝 미소를 짓자, 제임스는 당장이라도 릴리에게 입 맞출 기세였다. 시리우스와 리무스 역시 예상치 못했던 자세한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대단한데, 학년수석님?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진짜 알고 있을 줄이야."
"나도 놀랐어, 릴리. 그렇게 자세한 내용까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난 어렸을 때 머글 초등학교에 다녔잖아. 나랑 같은 학급에 일본계 혼혈이 있었거든. 그 친구가 3월 14일에 학급 전체에게 사탕을 돌리면서 얘기해줬어."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못 당하겠군, 못 당하겠어."
"새삼스럽게 왜들 그래, 무니 너까지."
시리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양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리무스 역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따라하자, 밀려드는 민망함에 릴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 섞인 칭찬이 싫지만은 않았던 듯, 그녀의 두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배시시 웃던 릴리는 무심코 고개를 제임스 쪽으로 돌렸다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던 제임스의 눈과 딱 마주치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약간 물러나 앉았다.
"제, 제임스? 왜 그래?"
"....이 정도면 오래 참았어."
릴리가 말을 마친 이후로 죽 입을 다물고 있던 제임스가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참기는 했다. 안 그래도 시리우스와 리무스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제임스를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릴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를 하라면 며칠 밤낮을 샐 제임스가, 리무스와 시리우스마저 감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얌전한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제임스와 7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한 두 사람은, 그가 '이성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선을 넘어갔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선 이후에는 모범생 릴리가 공공장소인 연회장에서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들 뿐이었다.
제임스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릴리를 이끌고 바람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제임스가 내팽개치고 간 당밀 퍼지와, 제임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여파로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는 릴리의 책더미 뿐이었다. 한숨을 내쉰 리무스는 지팡이를 휘둘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속이 타는 듯 호박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킨 시리우스가 빈 잔을 쾅 내려놓으며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결말은 늘 이런 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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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단편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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